告白

서신2025. 2. 23. 12:57

1.

누군가를 죽여본 적이 있나요.

달빛이 그날엔 노란색으로 빛났다가, 붉어지더니 색이 섞여 주황색으로 변했답니다. 날씨가 따뜻하진 않았어요. 바닥은 딱딱했고, 이불은 뻣뻣하고 냄새도 났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이불 안에서 조그마한 따뜻함을 느끼면서 신기한 현상들을 바라보고 있었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소소한 행복을 느낄 정도였어요. 그래서 하나짱, 아. 같이 살았던 누나요. 아무튼, 하나에에게도 이것을 보여주려 불렀는데, 대답을 하지 않더라고요. 푹 자는구나 싶어 고개를 돌린 순간, 검은 무언가가 저를 덮쳤어요.

곤도 씨. 저는 아직도 그 순간이 잊히지 않아요. 목을 붙잡혀 숨이 가빠와 점점 흐려지는 눈앞, 저를 찌르려고 하는 칼에 비친 주황빛깔의 달빛. 그리고 가장 무서웠던 건, 저를 죽이러 온 그 사람의 눈빛이었어요. 분명 죽이려 하는 건 그 사람이었는데, 왜 죽음과 가까운 듯 보이는 건 그 사람이었을까요.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나를 죽이지 못하면 그 사람이 죽는구나. 너는 날 가볍게 죽일 수 있겠지만, 너와 내 목숨의 무게는 같구나.

하나에가 준 은장도를 항상 들고 다녔어요. 더듬거리며 허벅지에 차고 있던 칼을 뽑은 뒤 흐려지는 눈앞으로 버둥거리며 팔을 휘둘렀고, 비명과 함께 천천히 제 목을 잡고 있던 손의 힘이 풀리고 있다는 게 느껴졌죠.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차렸을 때, 머릿속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하나였어요. 아, 내가 사람을 죽였구나.

분명 그 사람에게는 제 목숨이 가볍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제가 약한 탓인가 봐요. 저는 그 사람의 목숨을 짊어지는 것만으로도 버거워서, 더 이상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하고 싶지 않아요. 제 목숨이 가벼워졌으면 좋겠어요. 많은 사람을 죽이는 진선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 들어오게 된 것도 있네요. 제 죽음에 크게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나를 위해서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2.

곤도 씨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어색하게 웃다가, 장난스레 '...기합. 그래, 그렇지. 기합으로 이겨내 보는 거다!'라고 말을 건넨다. 히마리는 기분을 풀어주려는 그 행동에 맞춰 웃어 보인다. 상담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고맙다며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선 방을 나온다. 애써 올렸던 입꼬리가 이 방에 들어왔을 때와 똑같이 처지며, 조용한 복도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문 너머에서 옷가지가 스치는 소리가 난다.

소리의 정체는 토시로 씨였다. 그 큰 덩치로 숨어보겠다고 벽을 바라보고 있는 형태가 한심해 보일 지경이다. 아마 이야기를 들었으니 숨으려고 한 것이겠지. 이유를 짐작한 히마리는 숨은 척하고 있는 토시로에게 다가가 허리를 쿡쿡 쑤셔댔고, 토시로는 걸렸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챘는지 몸을 바르르 떨며 정자세로 선 뒤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 난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
- ...저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순간의 정적. 히마리는 토시로가 어색해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땀을 흘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토시로가 불쌍해 결국 침묵을 깨고 이야기를 꺼낸다.

- 됐어요. 좀 부끄럽긴 한데, 부장님이 어디 가서 그렇게 가볍게 이야기할 사람은 아니니까.
- 난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
- 아니, 그것밖에 말 못 해요? ...됐어요.

히마리는 말싸움에 힘이 빠진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린 채로 토시로를 떠나보낸다. 우울한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내일 할 일을 생각하며 산책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날씨가 쌀쌀하다. 바람이 세진 않았지만, 입김이 보일 정도로 온도가 내려가 저절로 몸이 떨릴 정도였다. 옷을 입고 나오든지, 그냥 방으로 들어가든지 어느 쪽이든 일단 들어가자 싶어 뒤를 돌려고 하자, 어깨 위로 누군가의 옷이 덮어진다.

- 히마리. 더워서 그런데 내 옷 좀 방에 가져다 놔라.
- 떨지 말고 얘기하시죠. 그리고 이 밤중에 무슨 일로 나오신 거예요?
- 산책.
- 아니 그럼 다른 길로..! 됐어요. 따라오든지 말든지.


3.

나도 누군가를 죽여본 적이 있다. 아니, 아무것도 못 들었어. 지금 잠 깨려고 혼잣말하는 건데?

형이 나를 지키려다 누군가에게 눈을 잃어버리고 난 뒤, 화가 나서 누군가를 죽인 기억이 있어. 정신을 차리고 난 뒤, 보이는 건 내 앞에 놓인 시체에서 나온 눈알 외에도 나를 받아준 가족들의 두려운 눈빛과 나 때문에 눈을 잃어버린 형은 두 번 다시 이 세상을 못 본다는 사실이더라. 그 뒤에 가시고기라는 이상한 별명을 누가 붙여버리는 바람에... 이건 신경 쓸 일 없고. 아무튼, 나는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이런 말이 네게 와닿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위로의 말은 반창고 같은 거라서, 붙여줘 봤자 치료에 큰 도움이 되진 않거든. 하지만 그럼에도 상처를 치료해 줄 방법을 모르는 우리가 붙여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곤도 씨도 같은 생각에서 그렇게 말한 거라 생각해. 바보 같은 판단이었지만.

나는 내 사람이 죽는 게 무섭다. 아직도 구하지 못한 사람의 삶을 어깨 위에 올려두고서 살아가고 있어. 그리고 나는 널 위해서 죽지 않을 거다. 그리고 너 역시 죽지 않고 여기서 살게 만들 거다. 내가 맞다고 말하는 게 아냐. 반창고를 떼어내고 상처가 아물어 아무렇지 않아졌을 때, 네가 맞다고 생각하는 걸 하라는 말이야.


4.

-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으셨네요.
- 난 아무것도 못...

말이 끝나기도 전에 히마리가 토시로의 정강이를 차버리는 바람에 고개가 숙여지며 말이 끊긴다. 토시로의 겉옷을 덮어쓴 히마리는 한 발로 콩콩 뛰는 토시로를 구경하다 말을 건넸다.

- 히지카타 씨.
- 왜.
- ... 아니에요. 돌아가요.

산책하러 왔다는 토시로의 말을 무시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가는 히마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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